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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이것은 음악이 아니다

에릭 사티가 남긴 서른 구절의 말

 

 

 

 

 

 

   

- 시이냐 료스케 지음, 최연희 옮김
- 126*196 / 320쪽
- 22,000원
- 2023년 11월 11일
- 979-11-86561-86-7 (03670)
- 010.4417.2905(대표 윤동희)

         
 

“듣지 마세요! 걸으세요, 이야기하세요!”
“나는 음악가가 아니다!”
“내 이름은 에릭 사티다. 다들 그렇듯이.”

짐노페디, 그노시엔느, 배 모양을 한 세 곡의 소품…… 음악의 역사에서 독자적 광채를 내뿜는 에릭 사티의 작품에는 엇갈리는 갖가지 해석이 뒤따랐다. 갖가지 미디어가 혼합된 그의 작품의 밑바탕에는 전통적 미학에 대한 삐딱한 도전적인 태도가 깔려 있었다.

‘음악계의 이단아’ 사티는 언어의 곡예사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글은 그의 음악만큼 기이하기 짝이 없다. 사티는 왜 썼을까. 사티를 둘러싼 맥락은 무엇이며, 기이한 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본의 음악학자 시이나 료스케는 그 자체로 대단히 독특한 사티의 작품과 그의 뜻 모를 말들을 ‘사티의 시각’으로 읽어내기 위해 사티에 관한 거의 모든 문헌을 샅샅이 파헤쳤다. 엉뚱한 재치로 가득한 사티의 글로 만나는 그의 세계관, 『에릭 사티, 이것은 음악이 아니다』를 사티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선사한다.

 




출판사 서평

“사티는 자신의 독백을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 마르셀 슈네데르(프랑스 음악평론가)

짐노페디, 그노시엔느, 배 모양을 한 세 곡의 소품……음악의 역사에서 독자적 광채를 내뿜는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의 작품에는 갖가지 해석이 뒤따랐다. 여러 미디어가 혼합된 작품의 밑바탕에는 전통적 미학에 대한 삐딱한 도전적인 태도가 깔려 있다.
사티는 풍자와 해학을 즐겼다. 이런 그의 면모는 작품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관료적인 소나티네’ ‘차가운 소곡집’ ‘엉성한 진짜 변주곡-개(犬)를 위하여’ ‘말의 옷차림으로’ ‘바싹 마른 태아(胎兒)’ ‘배(梨) 모양을 한 세 개의 곡’ ‘지나가 버린 한때’ 등 서로 모순되는 의미의 두 단어를 합쳐 놓거나 전혀 이미지가 연결되지 않는 단어를 합쳐 놓은 기묘한 제목은 듣는 사람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물론 그 속에 담긴 속뜻이 무엇일까 유추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사티는 선천적인 반골 기질의 소유자였다. 학창 시절부터 아카데믹한 음악에 반감을 품은 사티는 생계를 위해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정통파들은 “음악의 격을 떨어뜨린다”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사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패러디를 통해 고급 음악의 권위를 살짝 비트는 것을 즐겼다. 고전주의 작곡가 클레멘티의 소나티네 작품 36의 1번을 패러디한 《관료적인 소나티네》처럼 말이다.
외형적으로는 고전주의 소나타 형식을 따른 듯 보이는 《관료적인 소나티네》는 곳곳에 이를 살짝 비튼 풍자와 해학이 숨어 있다. 그중에서도 3악장의 ‘Vivace(빠르게)’를 ‘Vivache’로 표기한 부분이 압권이다. ‘vache’는 프랑스어로 ‘소[牛]’를 말한다. 빠르고 경쾌한 리듬을 지시하는 이탈리아어 ‘비바체’를 느릿느릿 여유롭게 움직이는 ‘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바꾸어 놓은 사티만의 언어 유희인 셈이다.
‘음악계의 이단아’ 사티는 언어의 곡예사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글은 그의 음악만큼 기이하기 짝이 없다. 인쇄 매체가 발달한 근대 이래로 많은 작곡가는 오선지를 잠시 물린 채 문장으로 자신들의 음악적 이념을 설파하고, 과거 또는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비평하며, 교육적·학문적 저술을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세기 전환기의 파리에서 세간의 몰이해 속에서 기상천외한 유머와 아이러니, 풍자와 역설을 늘어놓은 ‘권외 작곡가’ 에릭 사티의 존재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티는 왜 썼을까. 사티를 둘러싼 맥락은 무엇이며, 기이한 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본의 음악학자 시이나 료스케는 그 자체로 대단히 독특한 사티의 작품과 그의 뜻 모를 말들을 ‘사티의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사티의 언어의 맥락과 배경을 꼼꼼히 살펴보고, 사티의 (숨은) 의도를 파헤치기 위해 사티에 관한 ‘거의 모든’ 자료를 발굴하고 답사에 나선 그의 집념 덕분에 우리는 ‘사티’라는 텍스트(가사, 대본, 칼럼, 에세이, 강연문, 편지, 메모)에 감춰진 ‘비밀’과 ‘비의’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에릭 사티, 이것은 음악이 아니다』를 통해서 말이다.

* 에릭 사티는 누구인가?

프랑스 대혁명에서 파리 코뮌에 이르는 80여 년의 정치적 격변 이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에 활동했던 아방가르드 작곡가. 1866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방 옹플뢰르에서 해운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반항적이었고 농담을 즐겼다. 1879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했으나 아카데믹한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중퇴했다. 26세의 청년 사티는 쉬잔 발 라동과 6개월간 짧 은 사랑을 나누었다.
1887년 몽마르트르에 정착하고 나서는 개성적 차림새를 하고 알퐁스 도데, 기 드 모파상, 에밀 졸라, 샤를 구노, 클로드 드뷔시 등 파리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카 페 ‘검은 고양이(Le chat noir)’의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이름을 날렸다. 똑같은 모 양의 검은 벨벳 슈트 열두 벌을 돌려 입고, 백여 개의 우산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비가 오는 날에는 젖는다는 이유로 접고 다녔으며, 1인 종교의 사제이자 유일한 신자로 산 기인이었다.
사티는 시대를 앞선 ‘음악 발명가’였다. ‘안단테’ ‘모데라토’ ‘알레그로’ 등을 적어 야 할 악보의 지시어 자리에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라고 썼다. 같 은 악구를 무려 840번 반복하는 곡 《짜증》을 완성하고 나서는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하려면 아주 조용한 곳에 꼼짝 말고 앉아서 미리 단단히 연습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1963년 존 케이지와 열한 명의 피아니스트들은 이 곡을 15시간 연주하며 사티의 지시를 따랐다. 어디 음악뿐이랴. 사티는 수많은 그 림과 글을 남겼고, 우스꽝스러운 강연과 분노에 찬 외침으로 세상에 맞섰다. 사티에게 희망은 클로드 드뷔시였다. 드뷔시 스스로 ‘서정극’이라 이름 붙인 오페 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사티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1903년, 드뷔시는 사티에게 ‘형식’을 공부하도록 권했고, 사티는 《배 모양을 한 세 곡의 소품》으 로 화답했다.
파리음악원을 졸업하지 못한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드뷔시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사티는 39세였던 1905년 가을, 뱅상 댕디가 교장으로 있던 파리의 사립 음 악학교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대위법과 음악 이론을 공부하고 1908년 최우 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학업을 마친 사티 곁에는 라벨과 콕토가 있었다. 두 사람은 사티에게 연주를 알선 해주고, 곡의 출간을 도왔으며, 살롱을 드나드는 사티를 차에 태워줬다. 드뷔시는 처음에는 그를 존경했지만 나중에는 배척했고, 라벨은 그를 지지했으며, 콕토는 그를 우상화했다.
사티의 음악은 ‘침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침묵 이전에 온 것과 이후에 올 것 을 작곡했다. 1888년, 사티는 라투르의 시 「고미술품」에서 영감을 얻어 《짐노페디》를 작곡했다. 《짐노페디》는 부드럽고 매혹적인 선율의 왈츠 곡으로, 고전 적인 피아노 음악을 뒤엎었다.
1890년에는 조표와 세로줄을 폐지한 《그노시엔》을 작곡했다. 이 밖에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영감을 얻은 《소크라테스》, ‘가구처럼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음악’이 라는 뜻의 ‘가구 음악’도 사티가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다.
1898년 12월, 사티는 파리 남쪽 교외의 아르퀴유로 떠났다. 아르퀴유 코시가 22 번지, 다섯 평 남짓한 집, 수도도 전기도 없는 모기가 득실거리는 그곳에서 알코 올중독, 간경화, 늑막염으로 고생하면서도 아동 복지를 위해 힘쓰고, 밤에는 몽마 르트르의 카바레에서 일하며 수많은 샹송을 작곡했다.
1925년 7월 6일, 그의 장례식 날에는 날씨가 아주 화창했고, 장례 행렬은 매우 길었다. 향년 59세였다.

 

 

본문 중에서

 

사티의 악보 속 언어는 강렬한 아이러니를 표출하게 된다. 아르망고는 여기에서 당시의 예술적·문화적 교류의 영향을 거듭 읽어낸다(스트라빈스키, 미래파, 다다이즘, 디아길레프, 조르주 오리크, 앙리-피에르 로셰 등과의 만남). 이러한 다양한 교류를 통해 갖가지 미디어가 혼합된 형태의 작품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밑바탕 에는 종래의 전통적 미학에 대한, 정면을 피해 가는 삐딱한 도전적인 태도(아이러 니 형식을 취한)가 깔려 있었다.

요컨대 사티에게는 두 대의 피아노가 있었다. 그러나 사티가 죽고 나서, 홀로 살 며 누구도 들이지 않았던 그의 집에 들어간 사람들이 발견한 피아노는 ― 여러 명 이 증언하는 바람에 뒤죽박죽이지만 ― 건반이 벽을 맞대고 있었다거나, 두 대 모 두 세로로 놓여 있었다(!)거나 혹은 페달이 끈으로 결박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어 느 쪽이 사실이든지 사티는 집에서는 피아노를 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서 떠 오르는 것은 이웃집에서 클레멘티의 곡을 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 얼마나 슬픈 가” 하고 반응하는, 피아노를 위한 《관료적인 소나티네》다. 피아노 소음 공해는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사티가 혼자 살았던 집에는 그가 늘 고수했던 차림새 ― 중산모자, 흰 셔츠에 검 은 프록코트(당시 중급 관리의 일반적인 복장) ― 를 이루는 완전히 똑같은 옷이 여러 벌 있었다(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도깨비 Q타로’의 옷장 서랍이 떠오른 다). 그 밖에 약 100개의 우산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것도 여럿 이었다고 한다. 사티와 우산은 그야말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였다. 이에 대해서는 오르넬라 볼타가 솜씨 좋게 정리해두었는데, 사티는 폴리냐크 공작 부인 이나 러시아 발레단장 디아길레프로부터 작곡료를 받는 즉시 “가죽 우산”을 사거 나 “하루에 하나씩 우산”을 샀다. 조르주 오리크와 사이가 틀어진 것도 오리크가 무심결에 사티의 우산을 망가뜨렸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티는 세속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거물 행세’ ‘위세 좋은 놈들’을 싫어했 다. 기묘하게도 그는 거물 행세의 대표적인 예로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들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 뱅상 댕디는 “교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세를 부리지 않 는다고 평가했다. 사티에게는 훈장이나 로마 대상(大賞) 역시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티의 콤플렉스의 반영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명예를 바랐다. 손에 넣을 수 없어서 차라리 경멸하는 편을 택했을 뿐. 훈장을 거부한 라벨이나 로마 대상을 수상한 드뷔시에 대한 사티의 아이러니한 태도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1912년, 사티는 파리의 살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의 글이 국제음악협회에서 발행하는 〈S. I. M. 음악 잡지〉에 잇따라 게재되고(「건망증 환자의 회상」 「어느 바보[나]의 의견」), 아들린 랑트네가 부르는 《‘제국 극장’ 의 디바》가 파테 사(社)에 의해 녹음되었으며, 6월에는 롤랑 마뉘엘의 관현악판 편곡과 지휘로 사티의 《‘천국의 영웅적인 문’ 전주곡》이 연주되었다. 1913년 4 월 5일에는 라벨의 소개로 사티와 알게 된 피아니스트 비녜스가 국민음악협회에 서 《(개를 위한) 흐물흐물한 진짜 전주곡》을 초연했다. 이후 파리음악원에서 《자동 기록》을 초연하며 프랑스 안팎으로 사티의 작품이 울려 퍼졌다.

세상에 불만이 가득했던 사티에게 네 살 위의 드뷔시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1891 년, 드뷔시는 자신의 음악원 스승 에르네스트 기로의 수업에 청강생으로 사티를 추천했다. 1896년에는 사티의 《짐노페디》를 관현악판으로 편곡하고, 이듬해 에 라르 홀에서 연주했다. 사티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1902년 드뷔시가 쓴 《펠레아스와 멜리장 드》가 원인이었다.

사티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던 걸까. 브랑쿠시 역시 〈플라톤〉(1919) 〈소크라 테스〉(1922) 〈소크라테스의 독배〉(1933)를 제작한다. 나아가 본래 추상적이었 던 브랑쿠시의 작품은 점점 ‘희어져’, 대리석을 다듬어 만든 대표작 〈입맞춤〉을 비롯해 〈잠자는 뮤즈〉 〈공간의 새〉까지 실로 ‘새하얗’다. 사티가 브랑쿠시의 예술에 끼친 영향은 실로 이 정도였다. 브랑쿠시는 진심으로 사티를 좋아했던 모 양이다. 1925년에는 간경화가 악화되어 죽어가는 사티에게 손수 만든 특제 수프 (아마도 ‘흰’ 닭고기 수프)를 챙겨 가 먹였다. 브랑쿠시의 조수들은 사티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브랑쿠시의 읊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사티여, 어째서 죽어버렸단 말인가…….”

어느 날, 사티와 레제는 친구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견디기 힘든 요란스러운 음악이 들려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티는 이렇 게 말했다. “역시 가구 음악을 실현시킬 필요가 있겠군요. 요컨대 주위의 소음과 하나가 된 음악, 그것을 고려한 음악 말입니다. 내 생각에 이 음악은 선율적이고, 주의를 끌지 않으며, 나이프나 포크가 내는 소리를 덮어버리는 대신 누그러뜨립니 다. 자리를 함께한 이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무거운 침묵을 채워주고, 인관관계 의 일상적 상투성도 피하게 도와줍니다. 동시에 무분별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거리 의 소음도 중화시켜주지요.”

사티는 스스로를 ‘음악가’가 아닌 ‘음향 측정가’로 정의한다. 푸에의 말을 거꾸로 이용한 것이다. 푸에가 자신을 ‘음악가’(카스티용이나 슈비야르 같은 이류 작곡가 도 포함된)로 인정하지 않은 데 대해 ‘바라지도 않았다’고 응수했다고 할까. 드뷔 시의 진가도 모르는 인간이 뭔들 알까 싶은 기분도 있었을 테다. 동시에 이 아이 러니한 유머는 사티 자신에게도 그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즉 아무래도 자신은 예술가가 못 되며, 따라서 자신이 하는 일은 예술이 아니라는 생각을 의도치 않 게 언어화한, 생각지도 못한 발견이 아니었을까? ‘예술’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바 로 ‘과학’이다. 냉정하고 냉철한 태도로 대상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기록’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



 

차례

새김말 / 5
독자에게 / 7
사티를 읽다 / 9

1. 내 이름은 에릭 사티다. 다들 그렇듯이. / 27
2. 젊은 시절에 줄곧 이런 소리를 들었다. “쉰 살이 되면 보일 것입니다.” 나는 쉰 살이 되었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33
3. 피아노는 돈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만지는 사람에게만 즐거움을 준다. / 39
4. 엘리베이터에 깜빡 우산을 놓고 온 모양이다. (…) 우산은 나를 잃고 무척 걱 정하고 있을 것이다. / 45
5. 인간을 알면 알수록 개가 좋아진다. / 50
6. 베토벤은 공공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자다. / 55
7. 라벨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부했지만, 그의 음악 전체가 그것을 받아들이 고 있다. / 60
8. 드뷔시는 이 요리의 비법(가장 절대적인 비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 71
9. 우리의 정보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보증하지 않는다. / 78
10. 나는 흰 음식만 먹는다. 삶은 달걀, 설탕, 갈아낸 뼈, 죽은 동물의 지방, 송아 지 고기, 소금, 코코넛, 흰 물로 익힌 닭고기, 과일에 핀 곰팡이, 쌀, 무, 장뇌가 들어간 순대, 파스타, (흰) 치즈, 목화 샐러드, 그리고 몇 종류의 생선(껍질 없이). / 83
11. 담배를 피우세요.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당신 대신 피우고 말 겁니다. / 90
12. 등장인물이 무대에 나타날 때 오케스트라는 얼굴을 찌푸리지 말아야겠지요. 생각해보세요. 무대배경의 나무들이 얼굴을 찌푸리던가요? / 95
13. 예술에는 ‘진리’(물론 유일한 진리라는 의미에서)가 없다고 나는 항상 이야기 해왔으며, 내가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이야기할 것이다. (…) ‘예술의 진리’가 있 다는 것은 ‘기관차-진리’ ‘집-진리’ ‘비행기ꠓ진리’ ‘황제-진리’ ‘거지-진리’가 있다 는 선언을 듣는 것만큼이나 이상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 109
14. ‘가구 음악’은 본질적으로 공업적이다. (…) 우리는 ‘유용한’ 필요를 충족시키 기 위한 음악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예술’은 그 필요에 부합하지 않는다. ‘가구 음악’은 공기의 진동을 낳을 뿐이며, 그 밖의 다른 목적은 없다. / 119
15. 행진곡, 폴카, 탱고, 가보트 등은 ‘가구 음악’으로 대체되는 편이 낫다. ‘가구 음악’을 요청하십시오. ‘가구 음악’ 없는 모임, 집회 등은 있을 수 없다. 공증 사무 소, 은행 등을 위한 ‘가구 음악’…… ‘가구 음악’에는 이름이 없다. ‘가구 음악’ 없 는 결혼식은 있을 수 없다. ‘가구 음악’을 사용하지 않는 집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됩니다. ‘가구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한다. ‘가구 음악’ 한 곡을 듣지 않고 잠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잠을 설칠 것입니다. / 127
16. 공상으로 가득하며, 높은 담에 둘러싸인, 개인 소유의 작은 중세풍 마을. 주철 로 지어진, 안락하고 오래된, 수상쩍은 가옥. 무서운 외관에, 험궂은 정원이 딸린. (마법사를 위한) 낡고 조잡한 가구와 함께. / 135
17. 내가 음악가가 아니라고, 누구나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 141
18. 내 이력의 초창기부터 나는 줄곧 음향 측정가로 분류되어왔다. 내가 하는 일 은 순전히 음향을 측정하는 것이다. 《별들의 아들》 《배 모양의 소품》 《말의 옷차림으로》 《사라방드》를 살펴보면, 우리는 이 작품들의 창작에서 음악적 아 이디어는 지배적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곡들을 지배하는 것은 과학적 사고다. / 149
19. 작가들의 허가?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아! 작가들! 그들의 말을 들어 서는 좋을 게 하나 없다. 그들에게는 아이디어가 없으며, 있다고 해도 상업적이지 않다. / 155
20. 음악이 귀머거리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들이 벙어리라고 해도, 그 것이 음악을 무시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 162
21. 멜로디가 아이디어이며 윤곽이라는 점, 그리고 작품의 형식 & 소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에 비해 화성은 조명이며, 대상의 제시는 그 반영이다. / 169
22. 작품 하나를 쓰기 전에 나는 혼자서 그 주위를 여러 번 돌아본다. / 179
23. 함께 죽으러 왔습니다. / 191
24. 아이들은 많은 노인들보다 어리다는 점을 알아두십시오. / 200
25. 부인, 조심하세요. 당신은 살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살찐다는 것은 곧 늙는다는 것입니다!…… 솔페주에 스포츠를 도입한 달크로즈 방식으로 날씬함 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베토벤의 소나타 세 곡으로 나날이 뚜렷한 체중 감량 효 과를 얻을 수 있으며, 바흐의 푸가 여섯 곡은 지방 세포에 전격적 작용을 일으킵 니다. 이를 순환 형식 혹은 오토바이 형식의 테마로 연주하면 효과는 더욱 촉진되 겠지요. 해당 시설에는 골프, 복싱, 리듬 수영 담당 강사가 있습니다. / 209
26. 자네는 한쪽 눈으로 춤추는 법을 아는가?…… 왼쪽 눈으로 말일세…… (오른 쪽 눈을 가리키며) 이 눈으로 말이지. / 221
27. 재즈는 우리에게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 & ‘알 게 뭐람’……. 재즈가 아름답고도 현실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 233
28. 그렇다. 오늘날 ‘6인조’는 안타깝게도 그다지 값이 나가지 않는다(오네게르를 제외하고는). / 242
29. 내 하루 일과는 정확히 다음과 같다. 7시 18분 기상. 10시 23분에서 11시 47분까지 영감 얻기. 12시 11분에 점심 식사를 시작해 12시 14분에 자리에서 일 어난다. 13시 19분에서 14시 53분까지 정원 안쪽에서 건강을 위한 승마 겸 산책. 15시 12분에서 16시 7분까지 또 한 차례 영감을 얻는다. 16시 21분에서 18시 47분까지 이런저런 일(펜싱, 성찰, 가만있기, 친지 방문, 명상, 손재주 발휘, 수영 등). 저녁 식사는 19시 16분에 시작해 19시 20분에 끝낸다. 이어서 20시 9분에 서 21시 59분까지 소리 내어 교향곡 악보를 읽는다. 취침은 규칙적으로 22시 37 분. 주 1회 3시 19분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다(매주 화요일). / 249
30. 매우 ‘오전 9시’적으로. / 263

번외 / 277
사티의 초상 / 285
감사의 말 / 292
옮긴이 후기 / 294
참고문헌 / 298
찾아보기 / 308

 


지은이

시이나 료스케(椎名亮輔)

1960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파리 8대학 음악학과 박사과정 DEA, 도쿄대학 대학원 종합문 화연구과 박사과정, 니스대학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도시샤여자대학 학예학부 음악 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데오다 드 세브라크』로 제21회 요시다 히데카즈상을 수상했 다. 그 밖에 『음악적 시간의 변용』 『광기의 서양음악사』 등을 쓰고, 『음악을 생각하 기 위한 기본 문헌 34』를 엮었으며, 뤼크 페라리와 마이클 나이먼의 책을 일본어로 옮겼 다.

최연희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 해 넘게 출판 편집을 해왔다. 음악 관련 책으로 『거장들의 녹음현 장』을 옮겼고, 『트리스탄 코드』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굴드의 피아노』를 소 개했다. 그 밖의 번역서로 『자급을 다시 생각한다』(공역) 『성경 읽는 법』 『전쟁과 농 업』 『사회사상의 역사』 『중국요리의 세계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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