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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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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희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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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안에 이미 목적이 있습니다” 철학이란 존재를 완성하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진리는 저 너머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었다. 그는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를 의심하며 세계를 관찰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이방인’이었지만, 스스로 학교(리케이온)를 세워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수사학을 집대성했다. 그곳에서 제자들과 ‘산책’하며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이란 매일의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씨앗이 나무를 품듯 모든 존재는 자기 안에 목적을 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고 가르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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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소크라테스는 질문으로 아테네를 흔들었다. 안다고 믿었던 것이 몰랐던 것임을 깨닫는 무지(無知)의 지(知)였다. 그에게 철학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영혼 돌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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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이데아는 ‘본 것’이라는 그리스어 동사 이데인(idein)에서 나왔다. ‘영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결코 변화하는 일 없는 사물의 참된 모습이다. 플라톤에게 눈앞에 있는 것은 이데아의 모상(模像), 즉 모방하여 만든 상이었다. 인간이 감지하는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이데아계를 닮은 형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달랐다. 그는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의 박동과 내장의 구조와 식물의 생장을 관찰했다. 보이지 않는 관념을 멀리했다.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졌다. 세계는 변화무쌍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혼돈을 방치하지 않았다. 이럴까 저럴까, 막연한 추측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러운 감각을 신뢰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열 가지 범주(카테고리아, katēgoria)로 나누었다. ‘자체로서 있는 것’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것’이 범주의 형태들에 따라 속해 있다고 여겼다. 소크라테스라는 실체는 에이도스라는 ‘보편’을 품으면서도 지금, 여기 ‘개별자’로 존재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저 너머’에서 ‘보편’만을 담당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보편과 개별’을 하나의 사물 안에서 ‘통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실재하는 사물을 분류하여 ‘범주’로 만들었을까. ‘세상은 이렇게 생겼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 아리스토텔레스는 결정적 질문을 던진다. 행복은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내 안의 탁월함을 현실로 바꿀 때 만들어진다. 에네르게이아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고유한 기능이 밖으로 분출되어 일하는 상태다. 목적을 안에 품은 완성된 상태, 엔텔레케이아(entelecheia)에 이를 때 인간은 에우다이모니아에 도달한다. 씨앗이 참나무를 향해 자라나듯이 인간은 내면의 가능성을 현실의 행동으로 완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행동!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은 인간은 윤리적 실천으로 도약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에게 “지식의 양을 자랑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영혼에 깊이 새겨진 제2의 천성인 에토스, 즉 습관이 반복되어 탁월함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정수인 중용이 탄생한다. 중용은 기계적인 중간이나 비겁한 타협이 아니다. 전쟁터에서는 무모함과 비겁함 사이의 ‘용기’가 중용이고, 돈을 쓸 때는 인색함과 낭비 사이의 ‘관대함(후덕함)’이 중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위와 감정에서 초과와 부족이라는 양극단 중간에 덕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약. 에우다이모니아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매일 활을 들고 팽팽한 긴장을 견디며 활시위를 당기는 반복된 습관이 탁월함에 이르게 한다. 매 순간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 phronēsis)로 최선을 다해 목표를 맞히려 나아가는 삶의 궤적에서 행복은 완성된다. 중용은 상황에 따른 최적의 적중(的中)이다. 그 쌓임이 에우다이모니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땅히’라는 단어를 통해 중용의 덕을 서술한다.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마땅히 그래야 할 일,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중간이자 최선의 감정을 탁월성이라고 여겼다. 중용은 기계적으로 정중앙을 지칭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적절한 것을 취하는 것이다. 차례 1. 마케도니아 출신의 이방인, 세계를 관찰하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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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윤동희 북노마드 대표. 책을 만들고, 글을 쓰며, 대학과 도서관과 서점에서 미술과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네 영혼을 돌보라』 『멈춰서, 혼자서』 『좋아서, 혼자서』 『편집자의 일』(공저)를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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